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국가별 === [include(틀:제1차 세계 대전 평화 조약)] 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다.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했고, 독일은 [[그단스크|단치히]]와 주변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주게 되며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나치 독일]]은 이를 빌미로 [[폴란드 침공]]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 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 프랑스는 전몰 장병 추모일, 즉 현충일이 11월 11일이다. 이는 1차 대전 종전일인데, 프랑스는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보다도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양차 세계 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 [[프랑스 혁명]]과 정치적 숙청, [[나폴레옹 전쟁]] 등의 사상자로 인해 프랑스 인구의 증가율이 둔화되기 시작한 반면 독일은 18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극단적인 인구증가 정책을 쓰기도 하고 주변 지역을 흡수 통일하여 인구증가율이 상당히 커졌다. 1차 대전이 벌어질 즈음에는 이미 프랑스 인구는 독일의 2/3 수준으로, 세계 대전이 두 번 일어나는 동안 독일은 프랑스 이상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인구 차이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차이가 좁혀지는 중.][* 다만 역설적으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당시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실업문제에서 자유로웠다. (미국의 실업률이 25%에 달할 동안 프랑스는 실업률은 5%대로 타 국가에 비하면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는 잉여노동력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독일의 세력과 자신감이 커져서 2차 대전이 거대하게 일어나는 데 일조하게 되면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더욱 거대한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약체화 시키기에는 '''너무 허약한 조약'''이라는 이유로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전간기|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측 수석대표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페르디낭 포슈와 반대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이 과도해서''' '''독일이 [[복수]]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결국 남은 것은 [[제2차 세계 대전|더 큰 전쟁]]"'''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둘 다 일리 있는게, 독일이 완전히 무너질 만큼 가혹하지도 않았고, 독일이 복수심을 품지 않을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던, 이도 저도 아니었던 조약이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했다고 쳐도 독일 통합국가와 인프라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결국 언젠가는 국가 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빼앗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애초에 제국주의 시절에도 각국의 실질적인 역량은 식민지가 아니라 본국 국민들의 수준과 본국의 경제력으로 결정났었다. 당장 독일을 결딴낸 것도 식민지가 풍부한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가 있으나마나였던 [[미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간단하다.] 결국 20년 뒤 세계 3위의 경제력을 회복한 독일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유럽의 쇠퇴와는 비교되게 미국, 일본 등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된다. 미국은 영국을 넘어서 제일의 무역국가가 되고, 일본은 15위에서 8위로 도약한다. 미국은 유럽에 당시 가치로 100조 달러를 원조하고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을 대체해 세계 통화가 된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당시 주요 산업이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비중이 바뀌었고 매년 50~70%씩 성장하며, 광업, 해운업, 무역업에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때 까먹은 돈은 이때 완전하게 회복이 됐고, 당시 조선업은 세계 3위 수준으로 올라갔으며, 태평양([[남양청]])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근데 웃긴 건 중국도 같은 승전국이었다는 것. 어차피 일본이 날름한 중국 지역 식민지는 독일이 [[키아우초우|확보한 영토]]를 신경 못 쓰는 사이 거저 먹은 거지만... 결국 후에 [[키아우초우|前 카이저 독일령 중국 영토]]는 중국 5.4 운동의 여파와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간섭으로 도로 토해내게 되었다.]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 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 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 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1차 대전 후에는 해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식민지인들에게 많은 자치권을 부여해야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 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 독립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